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 저는 평생 잊고 살았던 이름이 있었습니다. 서진우. 마흔네 해 전, 제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사람. 제 인생을 두 쪽으로 갈라놓은 사람. 그리고 제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 "최영희 씨 맞으시죠? 고려대학교 87학번 최영희 씨요." 낯선 목소리였습니다. 젊은 여자 목소리. 저는 수화기를 꽉 쥐었어요. "누구시죠?" "저는 서진우 씨의 딸입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선생님 이름이 적힌 편지가 있어서요." 귀가 멍해졌습니다. 심장이 멈춘 것 같았어요. 서진우. 그 이름을 들은 게 얼마만인가요. 저는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2024년 겨울, 서울 은평구의 조용한 아파트. 저는 올해 일흔여섯입니다. 혼자 살아요. 남편도, 자식도 없이. 아니, 있었는데 잃었습니다. 모든 걸 잃었어요. "그분이... 돌아가셨다고요?" "네. 지난주에요. 홀로 계시다가... 발견되셨어요." 고독사. 그 단어가 머릿속에 스쳤습니다. 서진우도 저처럼 혼자였던 건가요. 그 화려했던 사람이, 그 잘나가던 사람이. "유품 중에 선생님께 전해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혹시 만나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는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마흔네 해. 그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보지 않았고,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어요. 증오했으니까요. 아니, 증오해야만 살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저는 오래된 서랍을 열었어요. 맨 아래에 빛바랜 사진첩이 있었습니다. 먼지를 털어내고 펼쳤어요. 1985년 봄.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스무 살의 저. 까만 생머리에 둥근 얼굴. 미래가 창창하다고 믿었던 그 시절의 저. 그리고 제 옆에 서 있는 사람. 서진우. 날카로운 눈매에 강인한 턱선.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던 그 사람. 저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어요. 기억이 강물처럼 밀려왔습니다. ─── 1985년 3월, 저는 고려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시골 충청도 작은 읍내에서 올라온 저에게 서울은 낯설고 무서운 곳이었어요.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고, 지하철은 타본 적도 없었습니다. 대학 캠퍼스를 처음 밟았을 때, 너무 넓어서 길을 잃을 것 같았어요. 입학식 날, 저는 대강당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어요. "혹시 입학식장 찾아요?" 돌아보니 남학생이 서 있었습니다. 청바지에 하얀 셔츠. 머리는 짧게 깎았고, 눈빛이 날카로웠어요. 그런데 웃는 얼굴은 의외로 다정했습니다. "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서요." "따라와요. 나도 그쪽으로 가." 저는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그게 서진우와의 첫 만남이었어요. 걸으면서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신입생이구나. 어디서 왔어요?" "충청도요. 서천이라는 작은 동네예요." "아, 시골에서 왔구나. 서울은 처음이지?" "네, 너무 복잡해서 정신이 없어요." 그 사람이 빙그레 웃었어요. "금방 익숙해질 거야. 나도 처음엔 그랬어." 대강당에 도착해서 저는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때는요. 하지만 저는 이상하게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날카로운 눈빛, 다정한 웃음. 묘한 조합이었어요. 입학하고 며칠 후, 저는 도서관 앞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 "아, 그날 그 신입생." 그 사람이 먼저 알아봤어요. 저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안녕하세요." "뭐 해? 수업 없어?" "점심 먹으러 가려고요." "나도 점심시간인데. 같이 먹을까?" 그렇게 저희는 함께 학생식당에 갔습니다. 그 사람은 경제학과 3학년 서진우라고 자기소개를 했어요. 학생회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요즘 학교 분위기 어때? 적응은 되고?" "네, 그런데... 조금 무서워요." "무서워? 뭐가?"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캠퍼스에 경찰들이 자주 오잖아요. 그리고 선배들이 뭔가 외치면서 행진하고..." 그 사람이 숟가락을 내려놓았어요. "그거 무서워?" "네, 저희 시골에선 그런 거 본 적이 없어서요." 그 사람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건 무서워할 게 아니야. 우리가 왜 그러는지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저는 고개를 갸웃했어요. "왜 그러시는데요?" 그 사람이 저를 똑바로 쳐다봤습니다. "지금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사람들이 왜 거리에 나서는지 알아?" 저는 솔직히 몰랐습니다. 시골에서 공부만 하다 온 저에게 정치는 먼 세상 이야기였어요. 저는 그저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좋은 직장 얻어서 가족 부양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잘 몰라요." "그럼 알아야 해. 모르면서 사는 건, 눈 감고 사는 거야."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눈 감고 사는 것.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 저도 그랬던 건 아닐까요. 그 뒤로 저는 서진우를 자주 만났습니다. 도서관에서, 학생식당에서, 캠퍼스 벤치에서. 처음에는 우연인 척했지만, 나중에는 서로 기다렸어요. 말은 안 해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우 오빠는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줬어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정권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왜 학생들이 거리에 나서는지. 저는 충격받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모르고 살았는지. "오빠, 저도 뭔가 하고 싶어요." 어느 날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진우 오빠가 저를 바라봤어요. "위험해. 너는 아직 신입생이고, 뭣도 모르잖아." "모르니까 배우고 싶은 거예요." "배운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한번 발 들이면 빠지기 어려워." "그래도 상관없어요." 진우 오빠가 한참을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좋아. 그럼 내가 소개해줄게." 그렇게 저는 학생운동에 발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진우 오빠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됐어요. ─── 1986년 봄이 왔습니다. 저는 스물한 살이 되었어요. 진우 오빠와 사귀기 시작한 지 일 년이 됐습니다. 우리는 비밀 연애를 했어요. 운동권에서 연애는 조심해야 했거든요. 사적인 감정이 조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숨길 수 없었어요. 눈빛으로, 손길로, 스쳐가는 대화로. 주변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을 거예요. "영희야, 조심해. 진우 선배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 깊이 빠지지 마." 같은 과 친구 현숙이가 걱정했습니다. 저는 웃었어요. "괜찮아. 우리 진지하게 만나고 있어." "그래서 걱정되는 거야. 요즘 상황 알지? 경찰이 학교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잖아. 진우 선배 같은 사람들 주시하고 있을 거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 저는 겁이 없었어요. 아니, 겁이 나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1986년 여름,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격렬해졌습니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과 충돌이 잦아졌어요. 진우 오빠는 더 바빠졌습니다. 집회 준비, 유인물 작성, 조직 관리. 저를 만날 시간이 줄었어요. "오빠,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어느 날 밤, 겨우 만난 자리에서 저는 물었습니다. 진우 오빠의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어요. 눈 밑에 그늘이 짙었습니다. "괜찮아. 지금 중요한 시기야.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뭐가 중요한 시긴데요?" 진우 오빠가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곧 큰 일이 있을 거야. 6월에. 전국적으로 동시다발 시위를 계획하고 있어." "6월에?" "응. 이번엔 달라. 학생만이 아니라 시민들도 함께 나설 거야. 노동자, 종교인, 일반 시민들까지." 저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이었어요. "오빠, 조심해요."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진우 오빠가 제 손을 꽉 잡았습니다. 그 손이 따뜻했어요. 하지만 그해 겨울,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 1986년 12월 어느 날, 저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누군가 달려왔습니다. "영희야! 큰일 났어!" 현숙이었어요. 얼굴이 창백했습니다. "왜 그래?" "진우 선배가... 진우 선배가 잡혀갔대!"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책을 놓치고 일어섰어요. "뭐라고? 언제? 어디서?" "아침에. 자취방에서 연행됐대. 경찰이 급습했다고..." 저는 뛰쳐나갔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그냥 뛰었어요. 진우 오빠의 자취방, 학생회관, 아는 선배들 연락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저는 잠을 자지 못했어요. 진우 오빠가 어디에 끌려갔는지, 무슨 혐의인지, 괜찮기나 한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일주일 후, 다른 선배를 통해 소식을 들었어요. "남영동으로 갔대. 대공분실." 남영동. 그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곳이었습니다. 고문으로 악명 높은 곳.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는지, 저도 들어 알고 있었어요. "오빠가... 거기 있다고요?" "응. 조직원 명단 불라고 추궁받고 있을 거야." 저는 무릎에 힘이 풀렸습니다. 주저앉을 뻔했어요. 그 뒤로 한 달이 지났습니다. 진우 오빠의 소식은 끊겼어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매일 울었어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학교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우 오빠가 풀려났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저는 달려갔어요. 진우 오빠가 있다는 곳으로. 한 선배의 자취방이었습니다. 문을 열었을 때, 저는 멈춰 섰습니다. 진우 오빠가 앉아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얼굴은 부어 있었고, 눈빛은 죽어 있었어요. 온몸에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오빠..." 저는 달려가 안았습니다. 진우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가만히 있었습니다. 인형처럼. "오빠, 괜찮아요? 많이 아팠어요?" "..." "오빠?" 진우 오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바라봤어요. "영희야." "네, 오빠."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오빠가 뭘 잘못했다고..." "나... 말했어."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뭘 말했어요?" "거기서... 견딜 수가 없었어. 너무 아팠어. 그래서... 이름을 댔어. 조직원 이름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무슨... 무슨 소리예요?" 진우 오빠가 고개를 떨궜습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잡혀갔어. 내가... 배신했어." ─── 그 뒤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진우 오빠가 이름을 댄 사람들이 줄줄이 체포됐어요.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까지. 조직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진우 오빠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들끓었어요. "배신자." "변절자." "밀고자." 그런 말들이 떠돌았습니다. 진우 오빠는 학교에 나오지 못했어요. 집에도 가지 못하고 어디론가 숨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진우 오빠를 원망해야 하는 건지, 동정해야 하는 건지. 고문이 얼마나 끔찍한지 저도 들어 알았습니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잡혀가고, 고통받았다는 것도 사실이었어요. 저는 진우 오빠를 찾아다녔습니다. 어디 있는지 알아내서 만났어요. 초라한 여관방에서 진우 오빠는 폐인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술병이 굴러다녔어요. "오빠." "왜 왔어. 나 같은 놈한테." "오빠, 저 아직..." "가. 나랑 엮이면 너도 위험해. 나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진우 오빠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깨가 떨렸어요. "오빠, 저는 오빠를 원망 안 해요." "그럼 넌 바보야. 나를 원망해야 해. 나를 증오해야 해. 나는 그럴 자격이 있어."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진우 오빠의 등이 너무 작아 보였어요. 그렇게 당당하고 강했던 사람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진우 오빠 곁에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옆에 앉아 있었어요. 진우 오빠가 울었습니다. 평생 처음 보는 모습이었어요. "영희야, 나 어떻게 해야 돼?" "몰라요, 오빠. 저도 몰라요."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다음 날 아침, 진우 오빠는 사라졌습니다. 쪽지 하나 남기고요. "영희야, 미안해. 나는 자격이 없어. 잘 살아." 저는 그 쪽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천 번 만 번 읽었어요. 그리고 울었습니다. 그게 1987년 초였습니다. 그 뒤로 저는 진우 오빠를 보지 못했어요. 소식도 끊겼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살아있기나 한 건지. ─── 1987년 6월이 왔습니다. 진우 오빠가 말했던 그 6월. 전국적으로 거대한 물결이 일었어요. 학생들, 시민들, 노동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민주화를 외치며. 독재 타도를 외치며. 저도 거리에 나갔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행진했어요. 진우 오빠가 꿈꾸던 그 날. 하지만 진우 오빠는 없었습니다. 6월 항쟁. 결국 우리가 이겼어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습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환호했어요. 울고 웃고 서로를 껴안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쁘지 않았어요.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진우 오빠는 어디 있을까. 이 광경을 보고 있을까. 아니면... 저는 그날 밤, 하숙방에 혼자 앉아 울었습니다. 역사적인 승리의 밤에, 저는 혼자 울고 있었어요. ─── 세월이 흘렀습니다. 1988년, 저는 대학을 졸업했어요. 출판사에 취직했습니다. 작은 출판사였지만, 제가 좋아하는 문학을 다룰 수 있어서 좋았어요. 진우 오빠에 대한 소문이 간간이 들렸습니다. 지방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더라, 아니 해외로 도망갔다더라.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이었어요. 저는 잊으려고 했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려고 했어요.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진우 오빠의 얼굴이, 목소리가, 온기가 자꾸 떠올랐어요. 1990년, 저는 선을 봤습니다. 어머니가 시골에서 중매를 붙여온 사람이었어요. 은행에 다니는 착실한 남자였습니다. 김태호라는 이름이었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태호 씨는 점잖은 사람이었어요. 말수가 적고, 성실해 보였습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저는 설레지 않았습니다. 진우 오빠를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두근거림, 그 뜨거움이 없었어요. 그냥... 편안했습니다. "영희야, 태호 씨 괜찮은 사람이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시집가야지." 어머니가 재촉했습니다. 저는 스물일곱이었어요. 그 시절엔 노처녀 소리 듣는 나이였습니다. 저는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진우 오빠를 잊기 위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서. 1991년 봄, 저는 김태호 씨와 결혼했습니다. 결혼식 날, 저는 웃었어요. 사람들 앞에서 행복한 척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진우 오빠를 찾고 있었어요. 혹시 와 있지 않을까.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없었습니다. 당연히 없었어요. 결혼 생활은 평온했습니다. 태호 씨는 좋은 남편이었어요. 저를 아꼈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좋은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어요. 1993년, 딸이 태어났습니다. 수진이. 예쁜 아이였어요. 저는 엄마가 됐습니다.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눈물이 났어요.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결혼 생활이 10년쯤 됐을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태호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요. 아니, 처음부터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요. 그 사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태호 씨는 아무 잘못이 없었어요. 그저 저의 진심을 받지 못했을 뿐이죠. 저는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늘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밤마다 진우 오빠 꿈을 꿨어요. 스무 살 그때의 진우 오빠.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 손을 잡고 걷던 한강변. 그 순간들이 꿈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습니다. 꿈에서 깨면 눈물이 흘렀어요.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자기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데.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2000년, 2005년, 2010년. 딸 수진이는 무럭무럭 자랐어요. 예쁘고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갔어요. 저는 수진이를 보며 살았습니다. 그게 제가 살아가는 이유였어요. ─── 2015년, 남편 태호 씨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폐암 말기. 손쓸 수 없는 상태였어요. 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미워한 적도 없는 사람인데, 사랑하지 못했던 죄책감이 밀려왔어요. "영희야." 병원 침대에서 태호 씨가 저를 불렀습니다. "네, 여보." "고마웠어. 25년 동안." 저는 울었습니다. "나야말로...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넌 좋은 아내였어. 좋은 엄마였고." 태호 씨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마른 손이었어요. "나 알고 있었어." "뭘요?" "네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 처음부터 알았어."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여보..." "괜찮아. 원망 안 해. 그래도 넌 내 곁에 있어줬잖아. 수진이도 낳아줬고. 그거면 됐어." 저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 알고 있었다니. 25년 동안. "영희야, 내가 떠나고 나면... 네 인생 살아. 미안해하지 말고." 그게 태호 씨의 마지막 말이었어요. 일주일 후, 태호 씨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용히, 평온하게. 잠든 것처럼. 장례식을 치르며 저는 생각했어요. 이 사람에게 저는 뭐였을까. 사랑받지 못하면서도 평생 곁에 있었던 이 사람에게. 저는 너무 잔인했던 건 아닐까. 수진이가 제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엄마, 울지 마." "수진아..." "아빠 좋은 곳 갔을 거야. 엄마, 너무 자책하지 마." 수진이는 다 큰 어른이 되어 있었어요. 스물두 살. 제가 진우 오빠를 처음 만났던 그 나이. ─── 태호 씨가 떠난 후, 저는 혼자가 됐습니다. 수진이는 졸업 후 취직해서 따로 나갔어요. 바쁜 회사 생활에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빈집에서 홀로 살았어요.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외로움이었어요. 어차피 저는 늘 혼자였으니까요. 결혼하고 있을 때도, 아이를 키울 때도, 마음속 깊은 곳은 늘 혼자였습니다. 가끔 진우 오빠 생각을 했어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살아있기나 할까. 행복할까.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적도 있습니다. 서진우. 경제학과. 87학번.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2020년,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세상이 멈췄어요. 저도 집에만 있었습니다. 수진이도 만나지 못했어요. 전화와 영상통화로 겨우 안부를 나눴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어요. 내가 고독사할 수도 있겠구나. 혼자 죽어서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냥 담담했어요. 어차피 혼자 살아왔으니까요. 혼자 죽는 것도 별다를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수진이가 걱정했어요. "엄마, 요양원에 가는 건 어때요?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덜 외롭잖아요." "괜찮아. 엄마는 혼자 있는 게 편해." "엄마..." "걱정 마. 잘 살고 있어." 거짓말이었어요. 잘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아있을 뿐이었어요. 그렇게 4년이 더 흘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전화가 온 거예요. 서진우가 죽었다는. ─── 약속 장소는 종로의 작은 카페였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했어요. 옷장을 열어 가장 점잖은 옷을 골랐습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봤어요. 일흔여섯 살의 노인. 주름진 얼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그 안에서 스무 살의 제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카페에 도착하니 젊은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서른 살쯤 돼 보였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어요. "최영희 선생님이시죠?" "네, 맞아요." "저는 서연지예요. 서진우 씨 딸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진우 오빠를 닮았습니다. 날카로운 눈매, 강인한 턱선.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앉으시죠." 우리는 마주 앉았습니다. 연지 씨가 작은 봉투를 내밀었어요. "이게 아버지 유품에서 나온 편지예요. 선생님 앞으로 쓴 거였어요. 발송하지 않은 채로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봉투를 받았어요. 누렇게 바랜 종이. 손때가 묻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만졌던 걸까요. "언제 쓴 거예요?" "날짜 보니까... 1987년이네요. 아버지가 떠나시기 직전에 쓴 것 같아요." 마흔다섯 해 전 편지. 그 긴 세월 동안 발송되지 못한 편지. 저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습니다. 손글씨가 보였어요. 진우 오빠의 글씨. 저는 그 글씨체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희에게. 이 편지를 쓰고 나면 나는 떠날 거야.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어. 그냥 멀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어. 나는 배신자야. 변절자야. 그 타이틀은 평생 따라다닐 거야. 하지만 네가 알아줬으면 해. 나는... 정말 견딜 수 없었어. 남영동에서 당한 것들. 그건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나는 부서졌어. 완전히. 하지만 그게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내가 이름을 댔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잡혀갔어. 그건 내 책임이야. 영원히 내 책임이야. 영희야, 너만큼은 잘 살아줘. 나 같은 놈 잊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져. 그게 내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거야. 나는 너를 사랑했어. 진심으로. 내 인생에서 진심으로 사랑한 건 너뿐이었어. 안녕, 영희야. 진우가." 저는 카페에서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상관없었어요. 마흔다섯 해 동안 받지 못한 편지. 마흔다섯 해 동안 듣지 못한 말. "선생님, 괜찮으세요?" 연지 씨가 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저었어요. 괜찮지 않았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았어요. 한참을 울고 나서, 저는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사셨어요? 그동안." 연지 씨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1987년에 지방으로 내려가셨대요. 작은 공장에서 일하셨고, 거기서 엄마를 만나셨어요. 제가 1994년에 태어났고요." "결혼하셨군요." "네. 하지만 행복하진 않으셨던 것 같아요.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아버지 마음속에 늘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고." 저처럼. 저도 그랬어요. "엄마가 2010년에 돌아가셨어요. 그 뒤로 아버지는 더 힘들어하셨어요. 저한테도 점점 연락을 안 하시더라고요." "왜요?" "모르겠어요. 아마... 죄책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자기가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진우 오빠.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았던 건가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본 게 3년 전이에요. 명절에 찾아갔는데, 얼굴이 너무 야위어 계셨어요. 밥도 제대로 못 드시는 것 같았고. 제가 같이 살자고 했는데 거절하셨어요." "왜요?" "폐 끼치기 싫다고. 혼자 살다 혼자 죽겠다고. 그게... 마지막 말씀이었어요." 저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발견됐을 때는..." "돌아가신 지 일주일 정도 됐대요. 이웃이 냄새가 난다고 신고해서... 경찰이 문 따고 들어갔대요." 고독사. 진우 오빠도 저처럼 혼자 살다 혼자 죽었군요.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선생님 사진이 있었어요. 대학 시절 사진. 그리고 이 편지랑... 선생님한테 보내려고 했던 것 같은 글들이 여러 편 있었어요." "여러 편이요?" "네. 발송 안 된 편지들이요. 1990년, 2000년, 2010년... 매년 쓰셨던 것 같아요. 근데 한 번도 보내지 않으셨더라고요." 저는 숨이 막혔습니다. 진우 오빠가 매년 저에게 편지를 썼다니. 평생을 저를 생각하며 살았다니. "그 편지들도 드릴게요. 아버지가 원하셨을 것 같아서." 연지 씨가 두꺼운 봉투를 건넸습니다. 손에 들어보니 묵직했어요. 얼마나 많은 말들이 담겨 있을까요. "감사해요, 연지 씨." "선생님, 아버지가... 행복하셨을까요?"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행복. 진우 오빠가 행복했을 리가 없었어요. 저도 행복하지 못했으니까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선생님을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평생 잊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그것만은 확실해요." 저도 그랬어요. 저도 평생 잊지 못했어요. 카페를 나와 저는 한강변을 걸었습니다. 1985년, 진우 오빠와 처음 걸었던 그 한강변. 그때는 젊었고, 사랑에 빠져 있었고, 미래가 창창하다고 믿었어요. 마흔다섯 해가 흘렀습니다. 그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민주화가 됐고, 나라가 바뀌었고,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여기 있어요. 늙고 지친 모습으로. 혼자서. 집에 돌아와 편지들을 펼쳤습니다. 진우 오빠가 40년 동안 쓴 편지들. 1990년. "영희에게. 결혼한다는 소식 들었어. 축하해. 행복해야 해. 꼭." 2000년. "영희에게. 딸이 초등학생이 됐겠구나. 예쁘겠다. 너를 닮았겠지." 2010년. "영희에게. 나는 여전히 여기야. 너는 거기서 잘 살고 있겠지. 그걸로 됐어." 2020년. "영희에게. 코로나 때문에 힘들지? 건강해야 해. 제발." 2024년. "영희에게. 이제 많이 늙었어. 곧 갈 것 같아. 너를 보고 싶지만, 볼 자격이 없어. 미안해. 사랑해." 저는 편지들을 가슴에 안고 울었습니다. 마흔다섯 해 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았던 두 사람. 끝내 만나지 못한 두 사람. 왜 그랬을까요. 왜 연락하지 않았을까요. 왜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저도 진우 오빠를 찾을 수 있었어요. 진우 오빠도 저를 찾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미안함 때문에. 그 결과가 이거예요. 진우 오빠는 고독사로 혼자 세상을 떠났고, 저는 여기서 혼자 울고 있어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왜 그때 더 붙잡지 않았을까. 왜 그때 따라가지 않았을까. 왜 그때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진우 오빠는 이미 떠났고, 저에게 남은 건 이 편지들뿐이에요. ─── 며칠 후, 저는 진우 오빠의 묘지를 찾았습니다. 연지 씨가 알려준 곳이었어요. 경기도 외곽의 작은 공원묘지. 저는 꽃을 들고 갔습니다. 국화꽃. 진우 오빠가 좋아했던 꽃이에요. 묘비 앞에 섰습니다. 서진우. 1963-2024. "오빠."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왔어요. 늦었지만."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치 진우 오빠가 대답하는 것 같았어요. "편지 읽었어요. 다 읽었어요. 마흔다섯 해 동안 쓴 편지들." 묘비에 손을 얹었습니다. 차가웠어요. "나도 오빠 생각했어요. 매일. 결혼해서도, 아이 낳아서도, 남편 떠나보내고도. 매일 오빠 생각했어요." 눈물이 흘렀습니다. "왜 연락 안 했어요? 왜 찾아오지 않았어요? 나 기다렸어요. 평생." 대답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없었어요. "미안해요, 오빠. 나도 미안해요. 그때 더 붙잡았어야 했는데. 따라갔어야 했는데." 저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묘비 앞에서 한 시간을 울었어요. 그리고 일어섰습니다. "오빠,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요?" 바람이 다시 불었습니다. 나뭇잎이 흔들렸어요. 마치 진우 오빠가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살아. 네 인생 살아. ───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수진이었어요. "엄마, 나 오늘 퇴근하고 갈게. 저녁 같이 먹자." "그래, 알았어." "엄마, 목소리가 이상해. 울었어?"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수진이에게 말할까요. 엄마가 평생 숨겨온 이야기를. 엄마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수진아, 오늘 저녁... 엄마 이야기 좀 해도 될까?" "무슨 이야기?" "엄마 젊었을 때 이야기. 대학 시절 이야기. 그리고...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 이야기." 수화기 너머로 수진이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 그런 사람이 있었어?" "응. 있었어. 오늘 그 사람 소식을 들었거든. 그래서... 이제 말해도 될 것 같아." "알았어, 엄마. 기다릴게." 전화를 끊고, 저는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겨울 해가 지고 있었어요. 노을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진우 오빠. 이제 놓아줘도 될까요. 마흔다섯 해 동안 품고 살았던 이 마음을. 이제 놓아줘도 될까요. 문득 깨달았습니다. 진우 오빠가 마지막 편지에 쓴 말. "사랑해." 저도 그 말을 해야 해요. 늦었지만. 저는 편지지를 꺼냈습니다. 마지막 편지를 쓰기로 했어요. "진우 오빠에게. 편지 고마워요. 마흔다섯 해 동안 기다렸던 편지. 오빠가 배신자라고 했죠? 아니에요. 오빠는 배신자가 아니에요. 그건 고문한 사람들이 배신자예요. 오빠는 피해자예요. 왜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어요? 왜 평생 혼자 짊어지고 살았어요? 나도 미안해요. 오빠를 찾지 못해서. 오빠한테 가지 못해서. 우리 둘 다 바보였어요. 서로를 사랑하면서 만나지 못한 바보들. 근데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요. 오빠는 떠났고, 나만 남았어요. 오빠,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은 시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수진이한테 우리 이야기 하려고 해요. 이제 숨기지 않으려고요. 오빠도 그러길 바랐죠? 사랑해요, 오빠. 나도 오빠 사랑했어요. 평생. 이제 편히 쉬어요. 영희가." 편지를 다 쓰고, 저는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노을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어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현관문 벨이 울렸습니다. 수진이가 왔어요. 문을 열었습니다. 수진이가 음식 봉지를 들고 서 있었어요. "엄마, 치킨 사왔어." "그래, 들어와." 수진이가 들어와 식탁에 음식을 차렸습니다. 저는 수진이를 바라봤어요. 서른한 살. 저보다 훨씬 당당하고 강한 아이. 이 아이가 제 희망이에요. "엄마, 아까 말한 그 이야기... 해줘." 저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습니다. "1985년 봄이었어. 엄마가 대학에 입학한 해." 수진이가 조용히 들었습니다. 저는 그 모든 이야기를 했어요. 진우 오빠를 만난 것, 사랑에 빠진 것, 민주화 운동, 그리고 배신과 이별. 평생 숨겨왔던 이야기를. 이야기가 끝났을 때, 수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그 사람... 사랑했어?" "응. 사랑했어. 지금도." "아빠한테는... 미안하지 않아?" 저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미안하지.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 하지만... 마음이란 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 수진이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엄마, 괜찮아. 이해해." "수진아..." "사람은 누구나 비밀이 있잖아. 말 못 하는 아픔이 있고. 엄마도 그랬던 거지." 수진이가 저를 안았습니다. 따뜻했어요.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였습니다. "엄마, 나 오늘부터 자주 올게.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 "괜찮아. 엄마 혼자 있는 거 익숙해." "그래서 더 안 돼. 그 아저씨처럼... 엄마까지 혼자 보내기 싫어."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요. "수진아, 고마워." "엄마, 앞으로 남은 시간... 행복하게 살자. 그 아저씨 몫까지."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진우 오빠. 들었어요? 수진이가 저더러 행복하게 살래요. 오빠 몫까지. 이제 정말 놓아줘도 될까요. 이제 정말. ─── 그날 밤, 저는 오랜만에 꿈을 꿨습니다. 1985년 봄. 고려대학교 캠퍼스. 스무 살의 저와 스물세 살의 진우 오빠가 함께 걷고 있었어요. 벚꽃이 흩날렸습니다. 꿈속에서 진우 오빠가 말했어요. "영희야, 행복해야 해." "오빠도." "나는 이제 괜찮아. 너만 행복하면 돼." 진우 오빠가 웃었습니다. 그 따뜻한 웃음. 마흔다섯 해 만에 다시 보는 그 웃음. "안녕, 영희야." "안녕, 오빠." 꿈에서 깨어났을 때,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마음은 평온했습니다. 진우 오빠가 떠났어요. 이제 진짜로. 창밖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었어요. 새로운 시작 같았습니다. 저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왔어요. 깊이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진우 오빠. 사랑했어요. 정말로. 이제... 저도 살아볼게요. 남은 시간. 오빠 몫까지.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연지 씨였어요. "선생님, 아버지 유품 정리하다가... 또 발견한 게 있어요." "뭔데요?" "선생님한테 남기신 것 같아요. 아버지가 평생 간직했던..." 저는 숨을 삼켰습니다. "그게 뭔데요?" "1985년에 찍은 사진이요. 선생님하고 아버지하고 같이 찍은 사진. 그 뒤에... 글씨가 있어요." "뭐라고 써 있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연지 씨의 목소리가 떨렸어요. "'평생 사랑하겠다. 영희에게. 진우.'" 저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 사진. 저도 가지고 있어요. 똑같은 사진을. 서랍 맨 아래에. "선생님?" "...네." "전해드릴게요. 선생님이 가지셔야 할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저는 서랍을 열었습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꺼냈어요. 첫 장을 펼쳤습니다. 1985년 봄. 고려대학교 정문 앞. 스무 살의 저와 스물세 살의 진우 오빠. 뒤에는 제 글씨가 있었어요. "평생 사랑하겠다. 진우에게. 영희." 저희는 서로에게 같은 말을 남겼던 거예요. 마흔다섯 해 전에. 그리고 평생 그 약속을 지켰어요. 비록 함께하지 못했지만. 비록 말하지 못했지만. 저는 사진을 가슴에 안았습니다. 오빠, 우리 약속 지켰어요. 우리 둘 다. 창밖에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얗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어요. 연지 씨가 가져온 사진은 낡고 빛바랬습니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어요. 얼마나 많이 만졌던 걸까요.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던 걸까요. 저는 그 사진을 받아 들었습니다. 1985년 봄. 고려대학교 정문 앞. 스무 살의 저와 스물세 살의 진우 오빠가 나란히 서 있었어요. 진우 오빠는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저도 수줍게 웃고 있었어요. 그때는 세상이 우리 것인 줄 알았습니다. 사진 뒷면을 뒤집었어요. 진우 오빠의 손글씨가 보였습니다. "평생 사랑하겠다. 영희에게. 진우. 1985년 4월 12일." 4월 12일. 그날이 뭔 날이었는지 기억났습니다. 우리가 처음 손을 잡은 날이에요. 한강변을 걸으며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그날. "선생님, 괜찮으세요?" 연지 씨가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연지 씨, 고마워요. 이렇게 찾아와주고." "아니에요. 아버지가 원하셨을 거예요." 연지 씨가 잠시 망설이더니 물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아버지 장례식 때 오셨으면 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못 드렸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갈 자격이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가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인데요." 가슴이 저렸습니다. "연지 씨." "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무슨 말씀 안 하셨어요?" 연지 씨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사실... 전화했었어요.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근데 제가 못 받았어요. 회의 중이어서." "..." "나중에 보니까 부재중 전화가 있더라고요. 다시 걸었는데 안 받으셔서... 바쁘신가 보다 하고 그냥 넘겼어요." 연지 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제가 그때 받았으면... 뭐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연지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연지 씨 잘못 아니에요. 아무도 몰랐잖아요." "근데 자꾸 생각나요. 아버지가 뭘 말씀하시려고 했을까. 마지막으로 뭘 하고 싶으셨을까."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진우 오빠가 마지막 순간에 뭘 생각했을까. 혼자 쓰러져 가면서 뭘 떠올렸을까. 저였을까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을까요. "연지 씨, 아버지 평소에 어떠셨어요? 무슨 얘기 많이 하셨어요?" 연지 씨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으셨어요. 어릴 때부터 그러셨거든요. 근데 가끔... 옛날 이야기 하셨어요." "무슨 이야기요?" "대학 다닐 때 이야기요. 친구들 이야기, 그때 했던 일들 이야기. 근데 자세히는 안 하시고 그냥... 그랬다, 이랬다 정도만요." 연지 씨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여쭤본 적 있어요. 아버지 왜 저러시냐고.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아버지 마음에 큰 상처가 있다고. 건드리지 말라고." "그래서 안 물어봤어요?" "네. 아버지가 불편해하실 것 같아서. 근데 이제 와서 후회돼요. 물어볼걸. 들어드릴걸." 저도 같은 후회를 안고 살아왔어요. 물어볼걸. 찾아갈걸. 말할걸. ─── 연지 씨와 헤어지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진우 오빠가 남긴 편지들을 다시 읽었어요. 마흔다섯 해 동안 쓴 편지들. 해마다 한 통씩. 한 번도 부치지 못한 채로. 1990년 편지를 다시 펼쳤습니다. "영희에게.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은행원이라고 했지? 좋은 사람이겠지. 너를 선택한 사람이니까. 축하해. 진심으로. 나는 지금 경기도 작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 기계 돌리는 일이야. 단순하고 반복적이지만, 그게 오히려 좋아. 생각할 틈이 없거든. 생각하면 너무 아프니까. 행복해야 해. 꼭. 진우가." 1995년 편지. "영희에게. 딸이 태어났다고? 축하해. 너를 닮았으면 좋겠다. 너처럼 따뜻하고, 너처럼 착하고. 나도... 딸이 생겼어. 연지라고 이름 지었어. 아내가 지었어. 아내는 좋은 사람이야. 나 같은 사람한테 시집와서 고생이 많아. 항상 미안해.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내 마음 어딘가에 너무 큰 구멍이 있어서, 그 구멍을 채울 수가 없어. 미안해. 아내한테도, 너한테도. 진우가." 2000년 편지. "영희에게. 새천년이야. 세상이 많이 변했어. 인터넷이라는 게 생겼더라. 컴퓨터로 사람을 찾을 수 있대. 너를 검색해봤어. 아무것도 안 나오더라. 다행이야. 네가 조용히 잘 살고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여전히 여기야.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아. 1987년에 멈춘 것 같아. 언젠가는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모르겠어. 진우가." 2005년 편지. "영희에게. 아내가 아파. 간이 안 좋대. 병원에 다니고 있어. 내가 잘해줬어야 했는데.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뭐하겠어. 연지도 컸어. 초등학생이야. 똘똘하고 착한 아이야. 이 아이만큼은 행복하게 키우고 싶어. 너도 딸 잘 키우고 있겠지. 좋은 엄마겠지. 진우가." 2010년 편지. "영희에게. 아내가 떠났어. 지난달에. 장례식 치르면서 생각했어. 나는 이 사람한테 뭘 해줬나. 사랑해준 적이 있나. 없었어. 한 번도. 20년을 같이 살았는데, 나는 늘 다른 데 있었어. 여기 있으면서 거기 있었어. 네 곁에. 미안해. 아내한테도, 너한테도. 다 미안해. 진우가." 편지를 읽으면서 저는 계속 울었습니다. 진우 오빠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얼마나 외롭게 살았는지. 그 무게를 혼자 지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도 태호 씨 곁에 있으면서 늘 다른 데 있었습니다. 진우 오빠 곁에. 20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온전히 거기 있지 못했어요. 우리 둘 다 같은 죄를 지었던 거예요.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해주지 못한 죄. ─── 며칠이 지났습니다. 수진이가 자주 찾아왔어요. 퇴근하고 들러서 저녁 같이 먹고, 이야기 나누고. 그 아이가 오면 집이 환해졌습니다. "엄마, 오늘 회사에서 웃긴 일이 있었어." 수진이가 회사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들으면서 웃었습니다. 이 아이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 아이가 없었으면 저도 진우 오빠처럼 혼자 떠났을지 몰라요. "수진아." "응?" "엄마가 고마워." "갑자기 왜 그래?" "그냥.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어서." 수진이가 저를 안았습니다. "엄마, 나도 엄마 있어서 다행이야. 앞으로 더 자주 올게. 혼자 두면 안 되겠더라." "괜찮아. 엄마 혼자 잘 있어." "아니, 괜찮지 않아. 그 아저씨 이야기 듣고 나서 무서웠어. 엄마도 그렇게 될까 봐." 저는 웃었습니다. 쓸쓸한 웃음이었어요. "수진아, 엄마 안 그래. 걱정 마." "약속해." "응, 약속할게." ─── 일주일 후, 연지 씨한테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 혹시 시간 되시면... 아버지 살던 집에 같이 가주실 수 있으세요?" "왜요?" "정리해야 하는데, 혼자 가기가 무서워서요. 그리고... 선생님이 보시면 좋겠다 싶은 것들이 있어요." 저는 망설였습니다. 진우 오빠가 살던 곳. 진우 오빠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 거기 가는 게 두려웠어요. 하지만 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진우 오빠를 제대로 보내주려면. "알았어요. 같이 갈게요." ─── 진우 오빠가 살던 곳은 경기도 외곽의 작은 빌라였습니다. 5층짜리 낡은 건물. 외벽에 금이 가 있었고, 계단에는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어요. 연지 씨와 함께 4층까지 올라갔습니다. 문을 열었을 때, 저는 숨이 막혔습니다. 좁은 원룸이었어요. 열 평 남짓. 작은 침대, 낡은 책상, 허름한 옷장. 그게 전부였습니다. 창가에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어요. 죽은 화분. 물을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여기서... 사셨어요?" "네.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여기로 오셨어요. 혼자 사시기 편하시다고." 저는 방 안을 둘러봤습니다. 벽에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어요. 가까이 가서 봤습니다. 1985년 봄. 고려대학교 정문 앞. 저와 진우 오빠. 같은 사진이었어요. 진우 오빠가 유일하게 벽에 걸어둔 사진. "이 사진... 항상 여기 있었어요?" "네. 제가 기억하는 한 항상요. 누구냐고 물어본 적 있는데, 아버지가 안 알려주셨어요. 그냥 옛날 친구라고만." 옛날 친구. 진우 오빠는 저를 그렇게 불렀군요. 책상 위에 노트가 있었습니다. 펼쳐봤어요. 일기장이었습니다. "2024년 11월 15일. 오늘도 영희 꿈을 꿨다. 스무 살 영희. 웃으면서 내 손을 잡던 영희. 꿈에서 깨면 너무 허전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언제까지. 연지한테 전화해볼까 생각했다. 근데 뭐라고 하지. 딸한테 폐 끼치기 싫다. 혼자 살다 혼자 가는 게 낫다. 영희는 잘 살고 있겠지. 행복하겠지. 그거면 됐다." 11월 15일. 돌아가시기 열흘 전이었어요. 다음 장을 넘겼습니다. "2024년 11월 20일. 몸이 안 좋다. 며칠째 밥을 못 먹었다. 일어나기가 힘들다. 병원 가야 하나. 근데 가서 뭐하나. 혼자 치료받고 혼자 돌아오는 것도 지겹다. 그냥 이대로 가도 괜찮을 것 같다. 미련 없다. 아니, 하나 있다. 영희 한 번만 보고 싶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 근데 그건 안 될 거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11월 20일. 돌아가시기 닷새 전.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2024년 11월 23일. 연지한테 전화했다. 안 받더라. 나중에 다시 해야지. 오늘따라 영희 생각이 많이 난다. 1985년 봄. 한강변. 처음 손 잡았던 날.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라고 할까. 아마 똑같이 했을 것 같다. 너를 사랑한다고. 평생 사랑하겠다고. 후회는 없다. 너를 사랑한 건 후회 안 해. 다만 미안하다. 끝까지 비겁했다. 이게 마지막 일기가 될 것 같다. 영희야, 사랑해." 저는 일기장을 덮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연지 씨도 옆에서 울고 있었어요. 진우 오빠. 마지막까지 저를 생각했던 거예요. 마지막까지. ─── 방을 정리하면서 진우 오빠의 물건들을 봤습니다. 옷장에는 낡은 옷 몇 벌. 양복은 하나도 없었어요. 작업복이랑 편한 옷뿐이었습니다. 책장에는 책들이 꽂혀 있었어요. 대부분 오래된 책들. 80년대, 90년대 출판된 것들. 그중에 한 권이 눈에 띄었습니다. 시집이었어요. 김수영 시집. 펼쳐보니 한 페이지가 접혀 있었습니다. "사랑의 변주곡." 그 시 옆에 진우 오빠의 손글씨가 있었어요. "영희를 생각하며. 1987년 겨울." 1987년 겨울. 진우 오빠가 떠나기 직전이었어요. 그때 이 시를 읽으면서 저를 생각했던 거예요. 시집을 가슴에 안았습니다. "선생님, 그거 가져가세요. 아버지도 원하셨을 거예요." 연지 씨가 말했습니다. "정말요?" "네. 다른 것도요. 선생님이 가지셔야 할 것들은 가져가세요." 저는 시집과 사진, 그리고 일기장을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진우 오빠의 마지막 흔적들.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는 한강변에 들렀습니다. 1985년 봄, 진우 오빠와 처음 손을 잡았던 그곳.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한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어요. 그때와 같은 물이 아니지만, 같은 강이었습니다. 벤치에 앉았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어요. 노을이 강물에 비쳤습니다. "오빠." 혼잣말로 불렀습니다. "나 왔어. 우리 처음 손 잡았던 데." 바람이 불었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 "오빠 일기 읽었어. 마지막까지 나 생각해줬구나."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도 그랬어. 매일 오빠 생각했어. 40년 동안." 강물이 반짝였습니다. 노을빛을 받아서. "오빠, 우리 왜 이렇게 됐을까. 왜 못 만났을까. 왜." 대답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없었어요. "오빠 미워했던 적 있어. 왜 날 두고 갔냐고. 왜 연락 안 했냐고. 근데 이제 알겠어. 오빠도 힘들었구나. 오빠도 무서웠구나." 저도 무서웠어요. 진우 오빠를 찾아가는 게. 거부당할까 봐. 다시 상처받을까 봐. 그래서 가지 못했어요. "오빠, 용서해줘. 나도 비겁했어."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내렸어요. 강변에 가로등이 켜졌습니다. "오빠, 이제 갈게. 이제 정말 갈게." 일어서서 한 번 더 강을 바라봤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그때는 도망가지 마. 알았지?" 바람이 한 번 더 불었습니다.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 그날 밤, 저는 수진이한테 전화했습니다. "수진아." "응, 엄마. 왜?" "내일 시간 있어?" "응, 주말이잖아. 왜?" "같이 어디 좀 가자." "어디?" "할머니 산소. 오래 안 갔잖아." 수진이가 잠시 침묵했습니다. "엄마,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가고 싶어서." "알았어. 내일 아침에 갈게." ─── 다음 날, 저와 수진이는 충청도 서천으로 내려갔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 어머니가 묻혀 계신 곳. 오랜만에 가는 고향이었어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창밖을 봤습니다. 겨울 들판이 펼쳐져 있었어요. 메마른 논과 밭. 앙상한 나무들. 하지만 어딘가 정겨웠습니다. "엄마, 여기 자주 왔었어?" 수진이가 물었습니다. "어릴 때는 많이 왔지. 명절마다. 근데 할머니 돌아가시고는 뜸해졌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2000년이었어요. 그 뒤로 고향에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힘들다는 핑계로. "외할머니 기억나?" 수진이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어릴 때 몇 번 봤는데, 잘 기억 안 나." "할머니가 너 엄청 예뻐하셨어. 손녀 손녀 하면서."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작은 체구에 주름진 얼굴. 늘 웃으시던 분이었어요. 제가 대학 간다고 할 때 제일 기뻐하셨습니다. ─── 산소에 도착했습니다. 작은 언덕 위에 어머니 묘가 있었어요. 아버지 묘 옆에. 두 분이 나란히 누워 계셨습니다. 저는 묘 앞에 꿇어앉았습니다. "어머니, 왔어요. 오래 못 와서 죄송해요." 수진이도 옆에 앉았습니다. "외할머니, 저 수진이에요. 많이 컸죠?" 바람이 불었습니다. 나뭇잎이 흔들렸어요. "어머니, 저 요즘 생각이 많아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은 시간 뭘 해야 하나." 묘비를 바라봤습니다. 최순임. 1935-2000. "어머니도 힘드셨죠? 시집와서 고생하고,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하고. 근데 불평 한 번 안 하셨어요." 어머니는 평생 불평 없이 사셨어요. 가난해도, 힘들어도, 늘 웃으시면서. 저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저도 어머니처럼 살고 싶었는데. 잘 안 됐어요. 저는 늘 뭔가 부족했어요." 수진이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엄마, 뭐가 부족해. 엄마 잘했어." "아니야. 엄마 많이 부족했어. 아빠한테도, 너한테도." "그런 말 하지 마."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수진아, 엄마가 미안해. 네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 못 해서." 수진이가 잠시 침묵했습니다. "엄마, 그거... 알고 있었어." "뭘?" "아빠랑 엄마 사이가 좀... 그랬다는 거. 느껴졌어."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느꼈어. 엄마가 아빠 볼 때랑 나 볼 때 눈빛이 달랐거든. 아빠한테는... 좀 거리가 있었어." 저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근데 괜찮아. 아빠도 알고 계셨잖아. 그래도 우리 가족이었잖아." "수진아..." "엄마, 자책하지 마. 사람 마음이 어디 내 맘대로 돼? 엄마도 힘들었을 거야." 수진이가 저를 안았습니다. 저는 울었어요. 어머니 묘 앞에서, 딸 품에 안겨서 울었습니다. "수진아, 고마워. 이해해줘서." "엄마, 앞으로는 솔직하게 살아. 숨기지 말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산소를 내려오면서 저는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오래전 풍경이 떠올랐어요. 어릴 때 뛰놀던 들판. 개울가. 뒷산. 다 변했지만, 어딘가 익숙했습니다. "엄마, 잠깐 마을 쪽 가볼까?" 수진이가 물었습니다. "그래, 가보자."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태어난 집이 있던 곳.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어요. 하지만 대문 앞 느티나무는 그대로였습니다. "저 나무, 엄마 어릴 때도 있었어?" "응. 저 나무 밑에서 많이 놀았어. 친구들이랑."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엄마, 여기서 뭐하고 놀았어?" "음... 고무줄, 공기놀이, 술래잡기. 그런 거." "지금 애들은 그런 거 안 하지?" "그러게. 세상이 많이 변했어." 저는 느티나무를 바라봤습니다. 이 나무는 저를 기억할까요. 60년 전 여기서 놀던 꼬마를. ─── 서울로 돌아오는 길, 저는 결심했습니다. 남은 시간, 제대로 살아야겠다고. 숨기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수진아." "응?" "엄마,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글을 쓰고 싶어." 수진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글? 무슨 글?" "엄마 이야기. 그리고 그 사람 이야기. 우리 세대 이야기." "책 쓰겠다고?" "책까진 모르겠고, 그냥 기록하고 싶어. 안 그러면 다 잊힐 것 같아서." 수진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아, 엄마. 해봐. 응원할게." "고마워." 저는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어요. 진우 오빠. 우리 이야기 기록할게요. 안 잊힐게요. ─── 집에 돌아와 저는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빈 노트를 펼쳤어요. 펜을 들었습니다. 첫 문장을 썼습니다. "1985년 봄, 나는 스무 살이었다." 거기서 멈췄어요.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그해 봄, 나는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사랑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조금씩 써내려갔습니다. 진우 오빠를 처음 만난 날. 입학식 날 길을 잃고 헤매던 저한테 말을 걸어준 그 사람. 밤새 썼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 며칠이 지났습니다. 저는 매일 글을 썼어요. 조금씩,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면서. 1985년, 1986년, 1987년. 그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의 이야기. 어느 날, 연지 씨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 혹시 시간 되시면... 만나뵐 수 있을까요?"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 연지 씨를 만났습니다. 같은 카페에서. "선생님, 사실... 제가 고민이 있어요." "무슨 고민?" "아버지 장례 치르고 나서, 제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삶이 공허하달까." 연지 씨가 커피잔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멀게 느껴졌어요. 늘 어딘가 다른 곳에 계신 것 같았거든요. 근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사셨는지." 저는 조용히 들었습니다. "선생님 편지 읽고 많이 울었어요. 아버지가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셨다는 거. 그게... 너무 슬프더라고요." "연지 씨..." "근데 동시에 부럽기도 했어요. 저는 그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거든요. 누군가를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연지 씨가 눈물을 닦았습니다. "선생님, 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연지 씨, 저도 몰라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연지 씨가 저를 바라봤습니다. "근데 하나는 알겠어요. 숨기면 안 된다는 거. 도망치면 안 된다는 거." "숨기지 말라고요?" "네. 저랑 연지 씨 아버지가 그랬어요. 평생 숨기고, 평생 도망치고. 그러다 이렇게 됐어요." 연지 씨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솔직하게 사세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하고. 미루지 말고." "선생님도 그러실 거예요?" "노력할 거예요. 늦었지만." 연지 씨가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해요. 아버지가 사랑한 분이 선생님 같은 분이어서 다행이에요." 저도 웃었습니다. "연지 씨 아버지도... 좋은 분이었어요. 정말로." ─── 카페를 나와 저는 거리를 걸었습니다. 겨울 햇살이 따뜻했어요. 사람들이 오가고, 차들이 달렸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어요. 진우 오빠 없이도. 저 없이도. 문득 깨달았습니다. 저도 언젠가 떠나겠구나. 이 세상에서. 그때 뭐가 남을까요. 뭘 남기고 싶은 걸까요. 수진이. 제 딸. 그 아이한테 뭘 남겨줄 수 있을까요. 돈? 없어요. 집? 조그만 아파트 하나뿐이에요. 그럼 뭘 남길 수 있을까요. 이야기. 제 이야기. 우리 이야기. 그게 제가 남길 수 있는 전부예요. ─── 그날 밤, 저는 다시 글을 썼습니다. 진우 오빠와의 마지막 만남. 1987년 초겨울. 그 허름한 여관방에서. "영희야, 가." 진우 오빠가 말했었어요. 등을 돌린 채로. "오빠, 나 안 가." "가라니까." "싫어. 나 오빠 안 버려." 진우 오빠가 돌아봤습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어요. "나 같은 놈이랑 있으면 너도 망해. 알아?" "그래도 상관없어." "상관없긴. 넌 아직 어려. 앞으로 살 날이 많아. 나 같은 놈한테 인생 낭비하지 마." 저는 울었습니다. "오빠, 왜 그래. 왜 그렇게 자기를 미워해." "미워할 수밖에 없어. 내가 뭘 했는지 알잖아." "그건 오빠 잘못 아니야.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야. 오빠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진우 오빠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야. 내가 약했어. 더 버텼어야 했어. 죽어도 안 말했어야 했어." "오빠, 그건..." "영희야." 진우 오빠가 제 어깨를 잡았습니다. "나 부탁 하나만 할게." "뭔데." "잘 살아. 나 잊고 잘 살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아. 그게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거야." "오빠..." "약속해." 저는 약속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 없었어요. 오빠를 잊겠다고, 다른 사람 만나겠다고. 그 말을 어떻게 해요.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됐어요. 다른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행복하진 못했지만, 살았습니다. 어떻게든. 진우 오빠가 원했던 대로. ─── 글을 쓰다 보니 새벽이 됐습니다. 창밖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어요. 밤새 썼더니 손이 저렸습니다. 노트를 덮고 창가에 섰습니다. 동이 트고 있었어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진우 오빠, 오늘도 살아갈게요. 오빠 몫까지. 그때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연지 씨였어요. "선생님, 죄송해요. 이른 시간에."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유품 정리하다가... 또 찾았어요." "뭘요?" "녹음 테이프요. 옛날 카세트테이프. 거기 선생님 목소리가 들어있어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제 목소리요?" "네. 아버지가 녹음해두신 것 같아요. 선생님하고 통화하신 거." 저는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진우 오빠랑 통화한 적이... 언제였더라. "1986년이에요. 테이프에 날짜가 적혀 있어요." 1986년.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때. 그때 통화를 녹음해뒀다니. "들어보셨어요?" "아뇨. 선생님이 먼저 들으셔야 할 것 같아서. 가져다드릴게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고 저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1986년의 제 목소리. 스물한 살의 저. 진우 오빠를 사랑했던 그때의 저. 38년 만에 다시 듣게 되다니. 가슴이 떨렸습니다.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고. 진우 오빠. 당신은 마지막까지 나를 놓지 않았네요. 창밖에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하루. 새로운 시작. 저는 그 테이프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1986년의 우리를 다시 만나기로요. 그리고 그날 오후, 연지 씨가 가져온 낡은 카세트테이프를 보는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이 테이프 안에 담긴 목소리가 모든 걸 바꿔놓을 거라는 것을. 진우 오빠가 남긴 마지막 선물. 38년의 시간을 건너온. 떨리는 손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여보세요? 오빠?" 스물한 살의 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진우 오빠의 목소리가. "영희야, 나야." 심장이 멎을 것 같았어요. 이야기가 재미있으셨나요? '다음'이라고 말씀하시면 이어서 들려드릴게요. 복사 Notion에 저장 다음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38년 전 그대로였습니다. "영희야, 나야." 진우 오빠의 목소리. 젊고 힘찬 목소리. 지금은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그 목소리가 작은 스피커를 통해 방 안을 채웠어요. "오빠, 어디야? 오늘 만나기로 했잖아." 스물한 살의 제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투정 섞인 말투.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어리광. "미안, 미안. 학생회 일이 늦게 끝났어. 지금 가고 있어." "빨리 와. 나 배고파." "알았어. 10분만." "오빠, 오늘 할 얘기 있어." "무슨 얘기?" "와서 해줄게." "뭔데. 궁금하게." "오면 알아."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진우 오빠의 웃음. 저의 웃음. 행복한 웃음. "알았어. 금방 갈게. 사랑해." "나도." 통화가 끊겼습니다. 저는 재생을 멈추지 않았어요. 테이프가 계속 돌아갔습니다. 잡음 사이로 또 다른 통화가 시작됐어요. "오빠, 나 지금 울고 있어." "왜?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오빠 목소리 들으니까 울컥해서." "바보야. 울긴 왜 울어." "오빠가 너무 좋으니까.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어서."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나도. 나도 네가 너무 좋아." "정말?" "진짜야. 너 만나고 나서 세상이 달라 보여. 힘든 일 있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영희야, 이거 끝나고 나면... 우리 결혼하자." 심장이 멎었습니다. 이 대화를 기억해요. 1986년 가을이었어요. 진우 오빠가 처음으로 결혼 이야기를 꺼냈던 날. "결혼?" "응. 지금 당장은 못 하지만, 나중에. 이 싸움 끝나고 세상이 바뀌면. 그때 결혼하자." "오빠, 나 아직 학생인데." "알아. 그러니까 나중에. 기다릴 수 있지?" "기다릴 수 있어. 평생이라도." "약속이다." "응, 약속." 테이프가 멈췄습니다. 끝이었어요. 저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그 약속. 지키지 못한 약속. 평생이라도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저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어요. 진우 오빠도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요. 하지만 우리 둘 다 그 약속을 잊지 않았어요. 평생. ─── 연지 씨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괜찮지 않았지만. "이 테이프... 아버지가 왜 가지고 있었을까요?" 연지 씨가 테이프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마... 잊고 싶지 않으셨겠지. 선생님 목소리를. 그때를." 저도 그랬어요. 잊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진을 간직했고, 추억을 마음속에 묻어뒀어요. "연지 씨, 이 테이프 제가 가져도 될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저는 테이프를 가슴에 안았습니다. 진우 오빠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 1986년의 우리가 담긴 테이프. "선생님, 사실 테이프가 하나 더 있어요." "더 있어요?" 연지 씨가 가방에서 또 다른 테이프를 꺼냈습니다. "이건 아버지 목소리만 담겨 있어요. 혼자 녹음하신 것 같아요." "혼자요?" "네. 날짜가... 2024년 11월이에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녹음하신 것 같아요." 손이 떨렸습니다. 진우 오빠가 마지막으로 남긴 목소리. "들어보셨어요?" "조금요. 근데 선생님한테 하시는 말씀 같아서... 제가 다 듣기가 좀 그랬어요." 저는 그 테이프를 받아 들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카세트테이프. 그 안에 진우 오빠의 마지막 말이 담겨 있었어요. ─── 연지 씨가 간 뒤, 저는 혼자 그 테이프를 틀었습니다. 잡음이 들렸어요. 그리고 기침 소리. 늙고 지친 기침 소리. "영희야." 진우 오빠의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와는 달랐어요. 힘이 없고, 갈라지고, 쉰 목소리. "이 테이프를 네가 들을지 모르겠어. 아마 안 듣겠지. 내가 죽어도 네가 알 리가 없으니까." 심장이 조여왔습니다. "근데 그래도 남기고 싶었어. 네 이름 부르면서 말하고 싶었어. 마지막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숨소리만 들렸어요. "영희야, 나 이제 갈 것 같아." "몸이 안 좋아. 며칠째 밥을 못 먹었어.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는데, 가기 싫어. 혼자 아프고 혼자 죽는 게 내 팔자인 것 같아."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울고 있는 것 같았어요. "후회되는 거 있냐고 물으면, 있어. 많아. 근데 제일 후회되는 건..." 잠시 멈췄습니다. "너한테 제대로 사과 못 한 거야." "1987년에 내가 떠났잖아. 쪽지 하나 남기고. 그게 너한테 얼마나 상처였을지... 나는 그때 생각 못 했어. 내 고통에만 빠져 있었으니까." "미안해, 영희야. 정말 미안해." "너는 잘못한 거 없어. 나만 잘못한 거야. 너는 나를 사랑해줬고, 나는 그 사랑을 버렸어." 기침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참을 기침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어요. "너 지금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좋은 남편 만나서, 예쁜 자식 낳아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나는... 그러지 못했어. 결혼은 했는데, 아내한테 미안하게 살았어. 마음이 늘 다른 데 있었으니까. 딸도 낳았는데, 좋은 아버지 못 해줬어. 내 안에 구멍이 너무 커서, 뭘로도 채울 수가 없었어." "그 구멍은 네가 만든 게 아니야. 내가 만든 거야. 스스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습니다. "영희야, 나 이제 눈이 감겨. 피곤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 "사랑해. 평생 사랑했어. 지금도 사랑해." "다음 생에 만나면... 그때는 도망 안 갈게. 끝까지 네 곁에 있을게." "안녕, 영희야." "잘 살아." 테이프가 멈췄습니다. 끝이었어요. 저는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온몸에 힘이 빠졌어요.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평생 울어본 적 없는 것처럼 울었어요. 진우 오빠. 당신도 나처럼 살았군요. 마음에 구멍을 안고.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을 안고. 우리 둘 다 불행했어요. 함께 못 해서. ─── 며칠이 지났습니다. 저는 테이프를 수십 번 들었어요. 진우 오빠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울었습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어요. 수진이가 걱정했습니다. "엄마, 밥 좀 먹어. 며칠째 안 먹잖아." "괜찮아. 입맛이 없어서." "엄마, 이러면 안 돼. 그 아저씨처럼 되면 어떡해." 그 말에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진우 오빠처럼. 혼자 쓰러져서 발견되는 것. 그건 안 돼요. "수진아, 미안해. 엄마가 정신 차릴게." 밥을 먹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살아야 하니까요. ───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수진이가 저를 데리고 나갔어요. 시내 구경하자고. 명동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젊은 연인들, 가족들, 친구들. 다들 웃고 있었어요. 행복해 보였습니다. "엄마, 예쁘다. 저 트리 좀 봐." 수진이가 가리킨 곳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었어요.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그러네. 예쁘다." 저는 트리를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1985년 크리스마스. 진우 오빠와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날. 그때도 명동에 왔었어요. 사람들 틈에 섞여 걸으면서 손을 잡고. 진우 오빠가 저한테 목도리를 사줬어요. 빨간색 목도리. "엄마, 무슨 생각해?" "응? 아, 아무것도." "거짓말. 또 그 아저씨 생각하지?" 수진이가 저를 뚫어지게 쳐다봤습니다. "티 나?" "응. 엄마 표정 보면 알아." 저는 쓸쓸하게 웃었습니다. "수진아, 여기 옛날에 그 사람이랑 왔었어. 크리스마스 때." "그래?" "거기 저 트리 있는 데 있잖아. 거기서 목도리 사줬어. 빨간색." "그 목도리 아직 있어?"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있어. 옷장 맨 아래에." 수진이가 제 팔을 잡았습니다. "엄마, 오늘 그 목도리 하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추억에 매달리는 것 같아서... 꺼내기가 그랬어." "아니야. 추억은 매달리는 게 아니라 간직하는 거야. 엄마 마음속에 그 사람이 있으면, 그냥 인정해. 숨기지 말고." 수진이가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됐을까요. 이 아이한테 배울 때가 됐나 봐요. ─── 집에 돌아와서 저는 옷장을 열었습니다. 맨 아래 서랍. 오래된 물건들이 담긴 곳. 그 안에서 빨간 목도리를 꺼냈어요. 39년 된 목도리. 색이 바래고 올이 풀렸지만, 아직 형태는 남아 있었습니다.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거울을 봤어요. 주름진 얼굴에 빨간 목도리.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따뜻했어요. "오빠, 이거 아직 있어."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39년 동안 간직했어. 버리지 못했어." 거울 속의 저를 바라봤습니다. 스무 살 때의 저와 지금의 저. 같은 사람인데, 너무 달라졌어요. "오빠도 많이 변했겠지. 나처럼." 진우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늙었을까요. 어떤 표정으로 살았을까요. 웃는 일이 있긴 했을까요. 연지 씨한테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습니다. 알면 더 슬플 것 같았어요. ─── 새해가 왔습니다. 2025년. 저는 일흔일곱 살이 됐어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0년? 5년? 아니면 내일 갈 수도 있어요. 새해 첫날,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그동안 조금씩 메모해둔 것들을 정리해서,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1985년 봄, 나는 스무 살이었다.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첫날, 나는 길을 잃었다. 대강당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헤매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혹시 입학식장 찾아요?' 돌아보니 키 큰 남학생이 서 있었다. 청바지에 하얀 셔츠.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웃는 얼굴은 따뜻했다. 그게 서진우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써내려가면서 그 시절이 되살아났습니다. 캠퍼스의 냄새, 도서관의 정적, 학생식당의 소란. 그리고 진우 오빠의 목소리, 웃음, 손의 온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격렬하게, 순수하게. 그 시대가 우리를 갈라놓을 줄도 모르고, 우리는 서로만 바라봤다. 1986년은 격동의 해였다.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진우도 그 중심에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서 함께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사랑하니까. 하지만 1987년, 모든 게 무너졌다. 진우가 잡혀갔다. 남영동. 그 악명 높은 곳에서 진우는 부서졌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배신자. 변절자. 그런 말들이 떠돌았다. 진우는 떠났다. 쪽지 하나 남기고. '미안해. 잘 살아.' 나는 그를 찾지 못했다. 아니, 찾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를 다시 만나는 게.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좋은 사람이었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늘 다른 곳에 있었다. 38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늙었다. 남편도 떠났다. 딸만 남았다. 그리고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서진우가 죽었다고. 고독사로. 나는 그제야 알았다. 진우도 나처럼 살았다는 걸. 마음에 구멍을 안고, 채우지 못한 사랑을 안고. 우리는 결국 같은 사람이었다. 서로를 사랑하면서, 서로를 놓아버린." 글을 쓰면서 울었습니다. 울면서 썼습니다. 수진이가 제 방에 들어왔어요. "엄마, 뭐 해?" "글 쓰고 있어." "그 이야기?" "응." 수진이가 제 어깨 너머로 화면을 봤습니다. "엄마, 이거 책으로 내면 어때?" "책?" "응. 엄마 이야기, 그리고 그 시대 이야기. 알려야 할 것 같아. 사람들한테."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누가 이런 거 읽어. 늙은이 푸념 같은 거." "아니야. 이건 푸념이 아니야. 역사야. 증언이야." 수진이가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엄마 세대가 겪은 일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몰라. 민주화가 뭔지,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희생했는지. 기록해야 해. 엄마가."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엄마 원래 출판사 다녔잖아. 글 잘 쓰잖아." 저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진우 오빠. 우리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도 될까요. 당신은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숨기고 싶었던 과거니까. 하지만 숨기면 안 될 것 같아요. 우리가 뭘 겪었는지, 왜 그렇게 됐는지,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수진아, 도와줄 수 있어?" "당연하지. 뭘 도와줄까?" "엄마가 쓸 테니까, 네가 정리 좀 해줘. 컴퓨터 이런 거 잘 모르니까." 수진이가 웃었습니다. "알았어. 엄마랑 같이 할게." ─── 그렇게 저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조금씩. 기억을 더듬으면서. 아픈 기억도, 행복한 기억도, 모두. 진우 오빠와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 이별까지. 그리고 그 이후 38년. 빠짐없이 썼어요. 쓰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하지만 쓰고 나면 마음이 좀 가벼워졌어요. 짐을 내려놓는 느낌이었어요. 한 달이 지났습니다. 초고가 완성됐어요. 200페이지가 넘는 분량. 제 인생이 담긴 글. 수진이가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울었어요. "엄마, 이거 진짜 좋아. 출판사에 보내보자." "받아줄까?" "받아줄 거야. 엄마 이야기 정말 감동적이야." 저는 반신반의하며 원고를 보냈습니다. 옛날 일하던 출판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익명으로. ─── 2주 후, 연락이 왔습니다. "원고 잘 읽었습니다. 출판하고 싶습니다." 믿을 수 없었어요. 진짜로 책이 되는 건가요. 출판사 편집자를 만났습니다. 젊은 여자분이었어요. 저보다 손녀뻘. "선생님, 원고 읽으면서 많이 울었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는 줄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세대가 겪은 일들, 저희 세대는 잘 몰라요. 교과서에 나오는 것 말고는. 이렇게 생생하게 들으니까 다르더라고요." 편집자가 저를 진지하게 바라봤습니다. "이 책, 꼭 내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해요." ─── 책이 나오기까지 3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저는 연지 씨를 다시 만났어요. "연지 씨, 저 책 쓰고 있어요." "책이요?" "네. 저랑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그 시대 이야기." 연지 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와... 정말요?" "실명은 안 썼어요. 걱정 마세요. 근데 아버지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괜찮겠어요?" 연지 씨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감사해요. 아버지 이야기가 남는 거잖아요." "아버지가 싫어하실 수도 있는데." "아니에요. 아버지 좋아하셨을 거예요. 선생님이 기억해주시는 거." 연지 씨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선생님, 아버지 장례식 때 조문객이 별로 없었어요. 친구도, 친척도 거의 안 왔어요. 아버지가 평생 혼자 사셨으니까." "..." "근데 선생님이 이렇게 기억해주시니까, 아버지도 외롭지 않으실 것 같아요." 저는 연지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분이었어요. 힘든 일을 겪어서 그렇게 된 거지, 원래는 정말 좋은 분이었어요." "알아요. 저도 알아요." 우리는 함께 울었습니다. ─── 2025년 봄, 책이 출간됐습니다. 제목은 "1985년 봄, 우리가 사랑했던 그때" 저자명은 제 본명이 아닌 필명을 썼어요. 최영. 영희의 영. 책이 서점에 깔렸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 없었어요. 무명 작가의 첫 책이니까요. 하지만 한 달 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받았다고 올렸습니다. "이 책 읽고 울었어요. 우리 부모님 세대가 이런 시대를 살았구나." "민주화가 이렇게 아픈 역사인 줄 몰랐어요. 교과서에서는 안 알려주는 것들."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어요." 리뷰가 늘어났습니다. 판매량도 올라갔어요.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습니다. 수진이가 저한테 화면을 보여줬어요. "엄마, 이거 봐. 엄마 책 3위야!" "3위?" "응. 대단해, 엄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읽힐 줄은. ─── 방송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습니다. 저는 망설였어요. 얼굴을 드러내는 게 두려웠습니다. 수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안 해도 돼. 근데 엄마 이야기 직접 들으면 더 와닿을 것 같긴 해." "나 같은 늙은이가 나가도 돼?" "엄마, 늙은이가 아니야. 역사의 증인이야." 역사의 증인.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저는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 촬영 날, 저는 떨렸습니다. 스튜디오에 앉으니 조명이 눈부셨어요. 카메라가 저를 향했습니다.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책을 쓴 이유가 뭔가요?" 저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잊히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뭐가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요. 싸웠던 사람들, 희생한 사람들, 그리고... 상처받았던 사람들." "책에 나오는 진우 씨도 그중 하나인가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진우 씨는... 제가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시대의 피해자이기도 해요." "배신자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쓰셨는데." "네. 하지만 진정한 배신자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을 그렇게 만든 시스템이 배신자예요." 진행자가 조용히 들었습니다. "저는 진우 씨를 용서했어요. 아니, 용서할 것도 없었어요. 그 사람은 잘못한 게 없으니까요. 그저... 살아남으려고 한 거예요. 누구나 그랬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카메라를 바라봤습니다. "우리 세대가 겪은 일들을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지금 살아계신 분들... 사랑하는 사람한테 표현하세요. 미루지 말고요. 저처럼 후회하지 않게." ─── 방송이 나간 후, 반응이 폭발했습니다. 책은 1위가 됐어요. 인터뷰 영상은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이 저한테 편지를 보내왔어요. 이메일로, 출판사를 통해. "선생님 이야기 읽고 아버지한테 전화했어요. 10년 만에요."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처음으로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얻었어요." 저는 그 편지들을 읽으며 울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니. 이렇게 의미 있을 줄이야. ─── 그러던 어느 날, 특별한 편지가 왔습니다. "최영 작가님께. 저는 1987년 남영동에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팔순이 넘었습니다. 선생님 책을 읽었습니다. 서진우라는 이름이 기억났습니다. 그때 제가 담당했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때 했던 일들이 꿈에 나옵니다. 매일 밤.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거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서진우 씨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죄송합니다." 저는 그 편지를 오래 바라봤습니다. 용서. 용서할 수 있을까요. 진우 오빠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겠죠. 그래야 저도 앞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요. ─── 봄이 왔습니다. 진우 오빠 묘지에 다시 갔어요. 이번에는 수진이, 연지 씨와 함께. 세 사람이 묘 앞에 섰습니다. 국화꽃을 놓았어요. "오빠, 책 나왔어요. 우리 이야기." 묘비를 쓰다듬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어요. 오빠 이야기도 알게 됐어요." 바람이 불었습니다. 벚꽃 잎이 날렸어요. "오빠, 이제 좀 편해졌어요?" 대답은 없었지만, 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진우 오빠가 웃고 있는 것처럼. 수진이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연지 씨가 반대쪽 손을 잡았어요. 우리 셋이 나란히 섰습니다. 진우 오빠 묘 앞에서. "아빠, 저 연지예요. 이제야 아빠를 이해하게 됐어요." 연지 씨가 말했습니다. "아빠가 왜 그렇게 사셨는지, 왜 그렇게 힘들어하셨는지. 이제 알아요." 연지 씨가 울었습니다. "아빠, 미워하지 않아요. 사랑해요." 저도 울었습니다. 수진이도 울었어요. 세 여자가 한 남자의 묘 앞에서 울었습니다. 각자 다른 관계였지만,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 묘지를 나오면서 연지 씨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해요. 아버지 이야기 세상에 알려주셔서." "아니에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있게 해줘서." "선생님,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을까요?" 저는 연지 씨를 바라봤습니다. 진우 오빠를 닮은 얼굴. "그럼요. 가족처럼 지내요." 연지 씨가 눈물을 글썽이며 웃었습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수진이가 제 팔짱을 끼며 말했습니다. "엄마, 이제 식구가 늘었네." 저는 웃었습니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진우 오빠. 당신이 남긴 사람들이 저한테 왔어요. 이제 우리는 가족이에요. 당신도 기뻐하겠죠?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는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 봄 햇살이 따뜻했어요. 진우 오빠, 저 이제 괜찮아요. 40년을 끌어안고 살았던 그리움, 이제 내려놓을게요. 완전히 잊는 건 아니에요. 그냥 다르게 간직할게요. 당신은 제 마음속에 영원히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그게 저를 아프게 하지 않아요. 따뜻하게 할 거예요. 사랑해요, 진우 오빠. 영원히. 그리고 잘 가요. 문득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모르는 번호였어요. "여보세요?" "최영 작가님이시죠?" 낯선 목소리였습니다. 나이 든 남자 목소리. "네, 맞습니다." "저는... 서진우와 같이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1986년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 책 읽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꼭 드려야 할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뭔데요?" "진우가 1987년에 떠나기 전, 저한테 맡긴 게 있어요. 선생님한테 전해달라고." 숨이 막혔습니다. "38년 만에 드리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진우 오빠가 저한테 남긴 것. 38년 동안 전해지지 못한 것. 그게 뭘까요. "만나뵐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전화를 끊고 저는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진우 오빠. 당신은 아직도 저한테 할 말이 남아 있었군요. 38년을 건너서. 약속 장소는 서울 종로의 오래된 찻집이었습니다. 50년은 됐음직한 건물. 나무 계단을 올라가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그 소리마저 정겨웠습니다. 이런 곳이 아직 남아있구나. 찻집 안은 어두컴컴했어요. 창가에 앉은 노인이 저를 향해 손을 들었습니다. "최영 작가님이시죠?" 팔순은 넘어 보였습니다. 하얀 머리카락, 주름진 얼굴. 하지만 눈빛은 또렷했어요. "네, 맞습니다." "앉으세요. 저는 박정호라고 합니다." 저는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차를 시키고 나서 그분을 바라봤어요. "진우 오빠랑... 어떤 사이셨어요?" 박정호 씨가 쓸쓸하게 웃었습니다. "같이 운동했죠. 1985년부터. 진우가 저보다 두 살 어렸는데, 저보다 더 대담했어요." 그분이 먼 곳을 바라봤습니다. 40년 전을 보는 눈빛이었어요. "진우가 선생님 얘기 많이 했습니다. 영희. 그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1987년 초, 진우가 풀려났을 때... 저한테 찾아왔어요. 밤중에." 박정호 씨가 낡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습니다. 작은 상자였어요. 손바닥만 한 나무 상자. 오래되어 색이 바랬습니다. "이걸 맡기더라고요. 영희한테 전해달라고." "왜 그때 안 주셨어요?" "주려고 했죠. 근데 진우가 사라지고, 선생님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수소문해봤는데 실패했습니다." 박정호 씨가 상자를 제 앞에 밀었습니다. "38년 만에 드리네요. 죄송합니다." 저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받았습니다. 가벼웠어요. 안에 뭐가 있을까요. "열어보셔도 됩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습니다. 안에는 반지가 하나 있었어요. 은반지. 가느다란 은반지.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랬지만, 형태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반지 옆에 작은 쪽지가 있었어요. 접혀 있었습니다. 쪽지를 펼쳤습니다. 진우 오빠의 손글씨. "영희에게. 이 반지, 주려고 샀는데 못 줬어. 청혼하려고 했는데, 그럴 자격을 잃었어. 근데 버리지 못하겠어. 네 거니까. 언젠가 받아줘. 받아주면 좋겠어. 사랑해. 진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멈출 수 없었어요. 청혼. 진우 오빠가 저한테 청혼하려고 했던 거예요. 반지까지 준비해놓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1987년 겨울, 모든 게 무너졌으니까. 박정호 씨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진우가 저한테 이 상자 주면서 그랬어요. 자기는 자격이 없지만, 이건 영희 거라고. 언젠가 꼭 전해달라고." "..." "미안합니다. 더 일찍 찾아봤어야 했는데."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에요. 이제라도 받아서 다행이에요." 반지를 손에 들었습니다. 조그맣고 가벼웠어요. 하지만 그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졌습니다. 38년. 이 반지가 저를 기다렸던 시간. 저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봤습니다. 약지에. 딱 맞았어요. 마치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 박정호 씨가 차를 마시며 말했습니다. "진우 소식, 저도 최근에 알았어요. 돌아가셨다고." "네." "불쌍한 친구. 평생을 그 짐 지고 살았어요." 박정호 씨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도 그때 잡혀갔어요. 진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경로로. 근데 저는 버텼습니다. 진우는 못 버텼고." "..." "사람마다 한계가 달라요. 진우가 약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운이 나빴던 거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진우 오빠가 약했던 게 아니에요.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무너질 수 있었어요. "저는 진우를 원망한 적 없어요. 저도 그랬을 수 있으니까." 박정호 씨가 저를 바라봤습니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네. 저도요." "다행이네요. 진우가 들으면 좋아했을 거예요." ─── 박정호 씨와 헤어지고, 저는 거리를 걸었습니다. 손가락에 반지가 있었어요. 38년 전 진우 오빠가 사둔 반지. 이제야 받았어요. 너무 늦었지만. 문득 깨달았습니다. 진우 오빠가 원했던 건 이거였구나. 저한테 이 반지를 주는 것. 청혼하는 것. 함께 사는 것. 하지만 운명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어요. 시대가 우리를 갈라놓았어요. 진우 오빠, 이제 받았어요. 당신의 마음. 늦었지만, 제 대답 할게요. 네, 좋아요. 당신과 결혼할게요. 마음으로. ───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섰습니다. 반지가 손가락에서 빛났어요. 오래된 은빛. 일흔일곱 살 노인의 손에 끼워진, 40년 전의 반지. 수진이가 들어왔어요. "엄마, 그거 뭐야? 반지?" "응." "어디서 났어?" 저는 수진이한테 이야기해줬습니다. 박정호 씨를 만난 것, 반지를 받은 것, 쪽지에 적힌 말. 수진이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 아저씨가... 엄마한테 청혼하려고 했구나." "응." "근데 못 했고." "응." 수진이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엄마, 이제 어떡할 거야?" 저는 반지를 바라봤습니다. "받아들일 거야. 이제라도." "뭘?" "진우 오빠의 마음. 그리고 내 마음도." 수진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잘했어, 엄마. 이제 놓아줄 수 있겠다." "아니, 놓아주는 게 아니야. 간직하는 거야. 다르게." 저는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어요. 진우 오빠, 저 이제 당신 아내예요. 마음으로. ─── 며칠 후, 저는 연지 씨를 만났습니다. 반지를 보여줬어요. "이게... 아버지가 준비하셨던 거예요?" "응. 38년 전에." 연지 씨가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아버지가... 선생님한테 청혼하려고 했구나." "그랬나 봐." "엄마한테는... 그런 거 안 하셨던 것 같아요. 반지도 안 사주셨고." 연지 씨의 목소리가 쓸쓸했습니다. "연지 씨 엄마한테는 미안하네요." "아니에요. 이해해요. 아버지 마음이 다른 데 있었던 거잖아요.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연지 씨가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화가 안 나요. 오히려... 아버지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다행이랄까." "연지 씨..." "아버지가 아무도 사랑 못 하셨으면 더 슬펐을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랑하셨으니까. 평생." 연지 씨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선생님, 그 반지 평생 끼고 계세요. 아버지도 원하셨을 거예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럴게요." ─── 봄이 깊어갔습니다. 벚꽃이 만개했어요. 거리마다 분홍빛 꽃잎이 흩날렸습니다. 저는 매일 글을 썼습니다.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첫 번째 책은 저와 진우 오빠의 이야기였어요. 두 번째 책은 그 시대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습니다. 박정호 씨한테 연락해서 인터뷰를 요청했어요. "제 이야기도 쓰시려고요?" "네.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목소리를 남기고 싶어요." 박정호 씨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할 말이 많아요. 죽기 전에 다 털어놓고 싶었는데." 그렇게 저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잡혀갔던 사람들. 고문당했던 사람들. 그리고 남아서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줬어요. 처음 말하는 것처럼 쏟아냈습니다. "저도 진우 씨처럼 이름을 댔어요. 그게 평생 짐이 됐어요." 어느 할머니가 울면서 말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이제 와서?" 저는 그분의 손을 잡았습니다. "용서는... 스스로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요?" "네. 자기 자신을 용서하세요. 그래야 앞으로 갈 수 있어요." 그분이 울었습니다. 한참을. ─── 여름이 왔습니다. 더운 날씨에도 저는 글을 썼어요. 에어컨 틀어놓고 밤새 썼습니다. 수진이가 걱정했어요. "엄마, 무리하지 마. 나이가 있는데." "괜찮아. 이거 끝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건강이 먼저야." "알아. 근데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수진이가 저를 뚫어지게 쳐다봤습니다. "엄마, 무슨 말이야. 어디 아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래." 일흔일곱.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예요. 내일 갈 수도 있고, 10년 후에 갈 수도 있어요. 모르는 거죠. 하지만 떠나기 전에 이 일은 끝내고 싶었습니다. ─── 가을이 됐어요. 두 번째 책 원고가 완성됐습니다. 제목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집. 저를 포함해서 스무 명의 이야기가 담겼어요.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일주일 후 연락이 왔어요. "선생님, 이번 원고도 훌륭합니다. 바로 출판 준비 들어가겠습니다." 기뻤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책 때만큼 설레지는 않았어요. 이제는 담담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 ─── 책이 나오기 전, 저는 진우 오빠 묘지에 다시 갔습니다. 혼자 갔어요. 가을 단풍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묘지 주변 나무들이 빨갛고 노랗게 타올랐어요. "오빠, 왔어요." 묘비 앞에 앉았습니다. "두 번째 책 곧 나와요. 오빠 이야기도 들어갔어요." 바람이 불었습니다. 낙엽이 흩날렸어요. "오빠,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죠?" 묘비를 쓰다듬었습니다. "오빠가 보고 싶어요. 아직도." 눈물이 났습니다. 여전히 울게 되네요. 이 나이에도. "오빠, 반지 잘 끼고 있어요. 매일." 손가락의 반지를 만졌습니다. 은빛이 가을 햇살에 반짝였어요. "오빠, 나 언제쯤 갈 수 있을까요. 오빠한테." 바람이 다시 불었습니다.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아직이야. 아직 할 일이 남았어. 그런 것 같았어요. "알았어요. 조금 더 있다 갈게요." ─── 그해 겨울, 두 번째 책이 출간됐습니다. 첫 번째 책만큼 많이 팔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의미 있는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관심을 가졌어요. "이 책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귀중한 구술 기록입니다." 어느 교수가 서평을 썼습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학술 논문보다 가치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연락이 왔어요. 대학에서 특강을 해달라고. 저는 수락했습니다. 떨렸지만, 해야 할 것 같았어요. ─── 특강 날, 저는 대학교 강의실에 섰습니다. 200명 가까운 학생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스무 살, 스물한 살. 1985년의 저와 같은 나이. "안녕하세요. 저는 최영입니다." 마이크를 잡은 손이 떨렸어요. "저는 1985년, 여러분과 같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어요. 운동에도 발을 들였고요." 학생들이 조용히 들었습니다. "그 시대가 어땠는지, 여러분은 잘 모르실 거예요. 교과서에 나오는 건 글자일 뿐이니까. 그래서 오늘 제가 직접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저는 1985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진우 오빠를 만난 것, 운동에 참여한 것, 그리고 1987년의 비극.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들었어요. 어떤 학생은 울었습니다. "저희 세대는 많은 걸 희생했어요.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고, 평생 상처를 안고 산 사람도 있어요. 그 덕분에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공부하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학생들을 바라봤습니다. "그걸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여러분도 할 일이 있어요." "무엇이냐고요? 기억하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거예요. 저희가 미처 못 한 것들을."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줄을 서서 저한테 왔어요. "할머니, 책 읽고 많이 울었어요." "선생님, 사인해주세요." "할머니, 저희도 뭔가 하고 싶어요. 뭘 하면 될까요?" 저는 한 명 한 명 손을 잡아주고, 사인해주고, 대화했습니다.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저는 오래 울었습니다. 기쁨의 눈물이었어요. 진우 오빠, 우리 이야기가 젊은 사람들한테 닿았어요. 당신이 꿈꿨던 세상, 조금은 이뤄진 것 같아요. ─── 2026년이 됐습니다. 저는 일흔여덟이 됐어요. 몸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걸으면 금방 지치고, 계단 오르기가 힘들었어요. 수진이가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엄마, 이제 혼자 있으면 위험해. 나랑 같이 살아." 저는 고개를 저었어요. "괜찮아. 아직은." "엄마, 고집 부리지 마." "고집이 아니라... 여기가 좋아서." 제가 사는 아파트. 20년 넘게 산 곳. 진우 오빠를 그리워하며 밤새 울었던 곳. 글을 쓰고 책을 낸 곳. 떠나기 싫었어요. 아직은. 수진이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럼 내가 자주 올게. 매일은 못 와도 이틀에 한 번은." "그래, 고마워." ─── 봄이 왔어요. 2026년 봄. 진우 오빠가 떠난 지 1년 반이 됐습니다. 저는 다시 묘지에 갔어요. 연지 씨와 함께. "선생님,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그럭저럭. 나이 먹으니까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어." 연지 씨가 웃었습니다. "오래 사셔야 해요. 아버지 몫까지." "노력할게." 묘 앞에 꽃을 놓았습니다. "오빠, 또 왔어요." 바람이 불었습니다. 봄바람. "오빠, 나 요즘 생각해요. 오빠한테 가면 뭐라고 할까." 연지 씨가 조용히 들었습니다. "먼저 오빠 얼굴 보고 싶어요. 젊었을 때 말고, 나이 든 오빠 얼굴." 묘비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손잡고 싶어요. 40년 전처럼." 눈물이 났습니다. "오빠, 거기서 기다려요. 내가 갈게. 조금만 더 있다가." ─── 그해 여름, 저는 병원에 갔습니다. 며칠째 기운이 없어서 검사를 받았어요.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췌장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밀 검사가 필요해요." 정밀 검사 결과, 췌장암이었습니다. 3기. 수술은 어렵다고 했어요. 항암 치료를 해볼 수는 있지만,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얼마나 살 수 있어요?" 제가 물었습니다. "치료하면 1년 정도. 치료 안 하면 6개월." 담담했습니다. 이상하게. 슬프거나 무섭지 않았어요. 아, 이제 갈 때가 됐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수진이한테 말했어요. 수진이가 무너졌습니다. "엄마, 치료하자. 제발." "수진아, 엄마 나이가 몇인데. 치료해봐야 고생만 하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수진이가 울었습니다. 펑펑. 저는 수진이를 안았어요. "수진아, 엄마 살 만큼 살았어. 후회없어." "엄마..." "걱정 마. 엄마 괜찮아." 하지만 수진이는 괜찮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연지 씨한테도 말했어요. 연지 씨도 울었습니다. "선생님, 아직 할 일 많잖아요. 세 번째 책도 쓰셔야 하고..." "연지 씨가 대신 써줘. 내 이야기." "제가요?" "응. 네가 이어가. 아버지 이야기도, 내 이야기도." 연지 씨가 제 손을 꽉 잡았습니다. "선생님, 약속할게요. 꼭 쓸게요." "고마워." ─── 저는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고통스럽게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집에서 편하게 떠나고 싶었습니다. 호스피스 서비스를 신청했어요. 간호사가 정기적으로 와서 상태를 확인해줬습니다. 수진이가 회사를 쉬고 저와 함께 있었어요. "엄마, 뭐 먹고 싶어?" "글쎄... 네가 만든 된장찌개?" 수진이가 된장찌개를 끓여줬습니다. 명숙이가 끓여주던 것과 비슷했어요. 아, 아니지. 태호 씨네 어머니가 끓여주던 맛. 이상하네. 죽음 앞에 서니까, 모든 게 섞여요. 기억이. 사람이. 시간이. ─── 가을이 됐습니다. 저는 점점 쇠약해졌어요. 걷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어요. 하지만 정신은 또렷했습니다. 그게 다행이었어요. 어느 날 밤, 수진이가 제 옆에 앉았습니다. "엄마, 나한테 해줄 말 없어?" "뭐?" "유언 같은 거." 저는 웃었습니다. "유언이라... 거창한 거 없어." 수진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수진아, 행복하게 살아. 엄마처럼 후회하며 살지 말고." "엄마..."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표현해. 숨기지 말고. 미루지 말고." "알았어." "그리고 연지 씨랑 가끔 만나. 걔도 혼자야. 서로 의지해." "응, 그럴게." 저는 수진이의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내 딸. 내 전부. "수진아, 사랑해. 엄마가 많이 사랑해." 수진이가 울었습니다. "나도 사랑해, 엄마." ─── 어느 날, 저는 꿈을 꿨습니다. 1985년 봄. 고려대학교 캠퍼스.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어요. 진우 오빠가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스물세 살의 진우 오빠. 청바지에 하얀 셔츠. 웃고 있었어요. "영희야." "오빠." 저도 스무 살이었어요. 까만 생머리에 둥근 얼굴. "기다렸어?" "응, 오래 기다렸어. 40년." 진우 오빠가 웃었습니다. "미안. 이제 같이 가자." "어디로?" "가면 알아." 진우 오빠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그 손을 잡았어요. 따뜻했습니다. 40년 전 그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어요. 벚꽃길을. 함께. ─── 2026년 11월 15일. 저는 눈을 떴습니다.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첫눈. 수진이가 옆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밤새 저를 지킨 모양이에요. 저는 손가락의 반지를 만졌습니다. 진우 오빠의 반지.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고 있었어요. 예쁘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우 오빠, 이제 갈게. 눈을 감았습니다. ─── 수진이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저는 이미 떠난 후였습니다. 평화로운 얼굴이었대요. 웃고 있는 것 같았대요. 손가락에는 반지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 저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수진이, 연지 씨, 박정호 씨. 그리고 제 책을 읽은 독자들, 특강을 들었던 학생들,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 수진이가 영정 사진을 골랐어요. 1985년 봄, 진우 오빠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제 얼굴만 잘라낸 사진. 스무 살의 저. 웃고 있는 저. 연지 씨가 조사를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버지의 연인이었고, 저에게는 또 다른 어머니 같은 분이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고, 용서하게 됐습니다." 연지 씨가 울었습니다. "선생님, 이제 아버지 곁에 가셨겠죠. 행복하세요. 이번엔 꼭." ─── 저의 유해는 화장됐습니다. 그리고 진우 오빠 묘 옆에 묻혔어요. 수진이와 연지 씨가 의논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두 개의 묘비가 나란히 섰습니다. 서진우. 1963-2024. 최영희. 1965-2026. 그 사이에 작은 비석이 하나 더 세워졌어요. "우리는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났습니다." ─── 그해 겨울, 연지 씨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남긴 메모들, 일기들, 그리고 진우 오빠의 편지들을 정리해서. 책 제목은 이미 정해져 있었어요. "1985년 봄, 다시 만난 그대에게" ─── 2027년 봄, 책이 출간됐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 자신의 후회, 자신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수진이가 진우 오빠와 저의 묘 앞에 책을 가져다 놓았어요. "엄마, 책 나왔어. 연지 언니가 썼어." 바람이 불었습니다. 봄바람. "엄마, 행복해?" 대답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벚꽃 잎이 날렸어요. 마치 웃음처럼. 수진이가 웃었습니다. "엄마, 나도 잘 살게. 엄마처럼 후회하지 않게." 묘비를 쓰다듬었습니다. "사랑해, 엄마. 그리고 아저씨도. 둘 다 행복하세요." 수진이가 묘지를 떠났습니다. 두 묘비가 나란히 봄 햇살을 받았어요. 서진우. 최영희. 40년을 기다려 다시 만난 두 사람. 이제 영원히 함께. ─── 하늘 어딘가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걷고 있었습니다. 스무 살의 영희와 스물세 살의 진우. 벚꽃이 흩날렸어요. 1985년 봄처럼. "오빠, 오래 기다렸어?" "응. 40년." "미안해." "아니, 고마워. 와줘서." 두 사람이 웃었습니다. "오빠, 이제 어디로 가?" "가면 알아. 같이 가자." "응." 손을 잡고 걸었어요. 끝없이 이어지는 벚꽃길을. 이번엔 놓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끝. ---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희와 진우의 사랑은 40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났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금 표현하세요. 미루지 마세요.